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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방법은 비록 많지만,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참선으로써 위없이 묘한 법문을 삼으셨다. 부처님께서 능엄회상(능엄경을 설하시던 법회)에서 문수보살에게 원통 법문을 말씀하실 때, 관음보살의 이근원통을 으뜸으로 치셨다. 우리가 듣는 자기의 성품을 들음을 돌이켜 듣기만 하면 이것이 곧 참선이니, 여기에 수행처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참선이라고 하는 이 한 법을 설명하겠다. 

1. 좌선의 기초
우리의 일상 생활이 모두 도(道)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어딘들 도량이 아니겠는가? 본래 어떤 선당도 필요치 않으며, 앉는 것만이 선(禪)은 아닌 것이다. 소위 선당이니 좌선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장애가 깊고 지혜가 얕은 말세의 중생을 위해서 베풀어져 있는 것일 뿐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작게는 병에 걸리고, 크게는 마(魔)가 붙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당 안에서 향을 들고 걷고 향을 피우고 앉는 것은 심신을 조절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이 외에도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은 많지만 중요한 것만 간략히 설명하겠다.
가부좌를 할 때에는 자연스럽고 바르게 앉아야 하며, 의식적으로 허리를 너무 꼿꼿이 세워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화(火) 기운이 위로 올라가므로 좌선이 끝난 다음, 눈곱이 끼고 입 냄새가 나며 기운이 머리로 솟구치고 입맛이 없어지기도 하며, 심할 경우에는 피를 토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머리를 수그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쉽게 혼침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 혼침이 온다고 느끼면 눈동자를 부릅뜨고 허리를 쭉 펴고 나서 가볍게 엉덩이를 옮기면 혼침이 사라질 것이다.
공부를 지나치게 급박하게 해서 마음이 어지럽고 초조할 때에는 모든 인연경계들을 놓되 공부까지도 놓아 버리라. 향이 반 마디쯤 탈 때까지 쉬면 서서히 편안해질 것이다. 그런 뒤에 다시 화두를 들어 공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누적되어 조급한 성격이 되거나 성을 잘 내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미쳐 버리거나 마(魔)가 붙게 된다.
좌선을 할 때 수용하게 되는 경계는 매우 많기 때문에 다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만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장애가 그대에게 이르지 않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괴이한 것을 보고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 괴이한 것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비록 요망한 마군이나 괴상한 귀신이 와서 그대를 뒤흔들더라도 거기에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또한 석가 부처님이 오셔서 그대에게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언젠가 성불할 것이라고 예견해 주신다 할지라도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기뻐해서도 안 된다.
능엄경에서 이른바 '거룩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좋은 경계라 한다. 만약 거룩하다는 생각을 내면 곧 온갖 삿된 것을 받게 된다'는 말은 이를 이른 것이다. 

2. 객진번뇌
그러면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능엄회상에서 교진나 존자가 객(客), 진(塵) 두 자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들 초심자가 공부를 시작해야 할 곳이다.
그는, "마치 지나가는 손님이 여관에 투숙하여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데, 먹거나 자고 나서는 짐을 꾸려 떠나야 하므로 오래 머물지 못하지만, 주인은 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지 않는 이는 손님이요, 머무는 이는 주인입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을 객이라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또 비가 개고 해가 나와서 햇빛이 문틈으로 들어오면 허공에 티끌들이 흔들리며 떠다니는 것을 보게 되는데, 티끌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허공은 고요히 움직임이 없으므로, 깨끗하고 고요한 것은 허공이라 하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이라 합니다. 흔들리는 것을 티끌이라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손님과 티끌은 망상에 비유한 것이요, 주인과 허공은 자성에 비유한 것이다. 상주하는 주인은 손님이 오든 가든 본래 그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상주하는 자성이 본래 문득 일어났다가 꺼지는 망상을 따르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른바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다면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티끌은 스스로 흔들려서 본래 맑고 고요한 허공에 장애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망상이 스스로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것일 뿐, 본래 여여부동한 자성을 장애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른바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손님이라는 것은 비교적 거칠고 티끌이라는 것은 비교적 미세하다. 그러므로 초심자가 먼저 주인과 손님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 망상에 휩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허공과 티끌을 가려낼 수 있게 되면 망상이 더 이상  장애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알아차리면 억울한 꼴은 당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아 이해하게 되면 공부 길은 이것만으로도 깨달은 바가 많을 것이다. 

3. 화두방편
옛날의 조사들은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에 하였으니, 저 달마 조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든가, 육조 대사의 '오직 견성만을 논한다'는 것들은 단지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면 되는 것으로서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후대의 조사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죽자 사자 달려들지 않고 기틀 속임을 하는 일이 많으며, 항상 다른 사람의 보배를 헤아려서 자기 집의 보배로 삼는 일이 허다함을 보시고, 부득불 각각 저마다 일가를 세우고 제각기 솜씨를 발휘하여 학인들에게 화두를 보게 하였다.
화두에는 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든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어떠한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 등등이다. 그러나 대체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화두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화두라고 하는가? 화(話)는 말이요, 두(頭)는 말하기 전이니, 저 '아미타불'을 염할 때'아미타불' 하는 말은 화요, 이를 염하기 전이 화두다. 이른바 화두(話頭)란 곧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니,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이미 말꼬리를 이루게 된다. 이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을 '나지 않음'이라고 부르니, 들뜨지 않으며, 혼침에 빠지거나 고요한 경계에 탐착하지도 않고 공(空)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또 이를 '없어지지 아니함'이라고 부르는데, 언제나 뚜렷이 밝아서 한 생각 빛을 돌이켜 다시 반조한다.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을 비추어 보는 것을 일러서 화두를 본다고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고도 한다. 

4. 의정
화두를 보려면 먼저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화두를 보는 길잡이이다. 어떤 것을 의정이라 하는가? 가령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할 때,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자기가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입으로 염불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으로써 염불하는 것인가? 만약 입으로써 염불한다면, 잠들었을 때 입은 그대로 있는데 왜 염불할 줄 모르는가? 만약 마음으로써 염불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이처럼 '누구인가?'에 가볍게 의심을 일으켜야 하며,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더욱 좋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이 의념을 붙들고 또렷하게 비추어 보되 마치 물이 땅 위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이 화두를) 볼 것이며 딴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 의념이 있으면 달리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없고, 만약 의념이 없으면 가볍게 다시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처음 마음을 쓸 때에는 반드시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움직임 가운데서 하는 것보다 힘을 얻기가 더 낫다. 다만 절대로 분별심은 내지 말아야 한다. 힘을 얻든 힘을 얻지 못하든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동중이든 정중이든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한 마음 한 뜻으로 공부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는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이며, 나머지 글자는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누구인가,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은 누구인가라든가, 무명을 타파하는 것은 누구인가, 혹은 능히 알고 느끼는 이것은 누구인가 해도 마찬가지이다.
행주좌와를 막론하고 이 '누구인가' 하나를 들면 곧 쉽게 의념이 일어날 것이다. 말을 뒤집어서이리저리 생각하고 헤아릴 것이 없으니, 이 '누구인가?' 화두야말로 실로 참선의 묘법이라 할 것이다.
다만 '누구인가?' 혹은 '염불시수' 네 글자를 가지고 의심하되, 부처님 명호 부르듯이 한다든지, 이리저리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오직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고 찾는 것을 일러서 의정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누구인가' 넉 자를 염불하듯 하면서 입에 붙이고 다니지만 그것은 아미타불의 염불을 하는 것보다 공덕이 더 크지는 않다. 또 어떤 이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리 저리 찾고 궁리하는 것을 의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망상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로 밑으로 떨어지는 격이니, 올바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념은 아주 거칠어서, 문득 끊어졌다가 문득 이어지며 금방 익은 듯하다가 금방 설어지니 의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점차 날뛰던 마음을 거두어 들이면 염두에 어떤 덩어리가 잡혀서 머물러 있게 되니, 비로소 참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점차 공부가 익어져서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 앉아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며 몸과 마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한 덩어리 의념이 현전(現前)하여 끊어짐없이 이어지는데, 이때 비로소 의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야 어찌 공부한다고 말하겠는가? 그저 망상을 제거한다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면 참의심이 현전하니 비로소 참으로 공부하는 시절이라 할 것이다. 이 시절에 하나의 큰 관문이 있으니. 흔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접어들게 된다.

1)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여 한없이 가벼워서, 만약 조금이라도 또렷이 비추어 봄을 놓쳐버리면 곧 가벼운 혼침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만약 눈 밝은 이가 옆에 있다면 한 눈에 발견할 것이다. 바로 이 경계를 일러서 '향나무 판자로 내려치니 즉시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는 것이다. 흔히 이 때문에 도를 깨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또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며 텅 비어 있어서 만약 의정이 없으면 곧 무기(無記)에 떨어져 마치 죽은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같이 앉아 있게 된다. 혹자는 이를 일러서 '찬물이 돌에 부딪쳐 물거품이 인다'고 하였다. 이 때에는 다시 바로 화두를 들어야 하며, 들면 곧 깨어있어 비추어 보게 된. 깨어있다 함은 미혹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곧 혜(慧)요, 비추어 본다 함은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니 곧 정(定)이다.
또렷하고 명료한 이 한 생각은 맑고 고요하게 비추며,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고 아주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으며 항상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지각하니 찬물에 연기 피어오르듯, 한 줄기로 면면히 이어져 끊이지 아니한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의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니 다시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화두를 다시 든다면 이는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는 격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니, 스님이 말씀하시되, "놓아 버려라" 하였다. 다시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놓아버립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되, "놓아버리지 않으려면 도로 짊어지고 가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때의 경계을 말한 것이다.
이 경계는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그 차고 따뜻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아서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경계에 이른 사람은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지만, 여기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주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른바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바칠 일이며,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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